7/20/15

Quadosh



성경에서 가장 두드러진 단어 가운데 하나는 카도쉬(quadosh), 즉 거룩이다. 이 단어는 다른 어떤 단어보다도 신성의 신비와 위엄을 상징한다. 세계사에서 최초로 거룩의 대상이 된 것은 무엇이었는가? 산이었는가? 제단이었는가?

카도쉬라는 특별한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창세기에서 창조기사 마지막에, 바로 시간에 대해서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 . "하나님께서 이 일곱째 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창 2:3). 창조 기사에는 공간적 차원에서 거룩하게 되었다는 대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적인 사고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다. 신화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후 성소가 세워질 거룩한 곳--거룩한 산이나 거룩한 샘--을 창조하셨을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거룩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시간 속의 거룩, 곧 안식일인 것으로 보인다.

. . . 현대 기독교에서 우리는 이러한 거룩한 시간의 개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우리는 자신의 성소에 집중하며, '교회'가 기독교 공동체의 사건들과 그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서, 즉 시간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이 성소를 교회라고 부른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대신에, 예배당에 간다는 의미에서 '교회에 가고'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기대힌다.

안식의 시간과 그 시간의 거룩함을 누리는 데 사용되는 물건들은 그 자체로써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더 분명해지게 하는 수단으로써 가치가 있을 뿐이다. . . 우리가 물질과 공간에 대한 소유를 그치고 안식일을 지킬 때, 시간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 

마르바 던, <안식> 중

Security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안전이며, 우리는 성공적으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어리석은 짓을 다 한다. . . 우리는 자신을 경제적으로 가장 안전하게 해줄 방법을 택하려고 여러 곳에 투자를 한다. 미국은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미사일과 폭탄과 발사 시스템을 점점 더 많이 만든다. 그런데 이 모든 것과 관련하여 우스꽝스러운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이처럼 거대한 핵무기 확산은 누군가가 사고로 또는 화가 나서 버튼을 눌러 우리 모두를 멸망시킬 위험을 증가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해를 끼친다. 우리는 더 큰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남보다 앞서가고 승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착취한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린다. 그러기에 감정적으로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 뒤에 자신을 숨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심히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안전을 확보하려는 우리의 시도 자체가,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그 안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전문직, 경제, 정치, 기술적인 해결책, 이 모든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안전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숨기는 환영의 거미줄이다. 전문직 자리는 사라질 것이다. 주식 시장은 붕괴될 수 있다. 정당은 큰 실수를 할 것이다. 기술적인 해결책은 해결하는 문제보다 더 많은 문제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동일하다. 우리는 언약에 신실하신 그분을 믿을 수 있다.

. . .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관하기를 그칠 때, 우리는 노예처럼 비굴한 의존심이 아니라 더 큰 자유를 누리게 된다. 나는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려고 애쓰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은사와 자원을 관리하는 충성스런 청지기가 되기를 추구함으로써 나의 존재를 철저히 누리는 특권을 선택할 것이다. 너무나 많은 상황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염려한다고 해서 내게 그다지 유익할 것이 없다. 그러나 모든 역사 위에 주님이 계심을 믿는다면--그리스도의 흰말이 전쟁의 붉은 말, 경제의 검은 말, 고난과 죽음의 청황색 말과 함께 달리며 역사의 과정을 주관한다는 것을 안다면(계 6;1-8)--나는 나의 통제를 벗어난 힘에 대한 걱정을 그칠 수 있을 것이다.

삶에 있어서 나의 책임은, 나의 창조자와 그분의 뜻을 사랑함으로써 나를 창조하신 목적에 가능한 한 충실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때 날마다 자유로이 그분과 동행하는 모험을 즐기며, 내가 하는 모든 것과 내가 되어 가는 전체 과정 속에서 그분의 임재를 연습할 수 있다.

마르바 던, <안식> 중

7/10/15



광야에서는 무엇을 쟁취하려는 믿음보다 그저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셨음을 인정하는 믿음이 더 필요한 것 같다. 히틀러에게 추방당해 미국으로 망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큰 슬픔과 고통에 직면했을 때일수록 은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 . 지금은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말라. 언젠가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아무것도 애써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아무 것도 각오하지 말라. 그저 네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여라."

이것이 광야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주어지는 상황과 순서대로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흘러나온다. 광야 생활에도 즐거움은 있다. 느린 걸음이 주는 여유가 있다. 참 신기하다. 천천히 걸을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빨리 달릴 때 불평이 더 많았고, 천천히 걸으니 오히려 감사할 것이 더 많아 보인다. 더 풍성한 삶의 이치를 발견한다. 내 고통을 아파할 시간도 얻는다, 고통당하는 이들의 아픔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애쓰지 않고 고요히 있어도 거저 위로를 얻는다. 연약한 나와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광야의 시간이 느린 이유는, 아픈 사람은 충분히 아픔을 느끼라는, 울어야 할 사람은 실컷 울고, 분노할 사람은 실컷 분노하라는 뜻이 아닐까? 감정을 억누르며 고통을 외면한 채 그렇게 살지 말라고, 광야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다. 광어는 삶의 부조리로 인한 고통과 억울함을 견디게 한다. 광어는 극복해야할 곳이 아니라 그저 꿋꿋이 지나가는 곳이다.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김병년, <난 당신이, 좋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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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라는 단어가 이때만큼 절실히 와닿은 적이 없었다.

지금 살아내야 하는 현실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기를 잠시라도 게을리하면, 
내 삶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희망없는 나날일 뿐이다.


김병년, <난 당신이, 좋아> 중